▲ 김선영 약사(군산 아이약국)

약국을 운영하다 돌연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한 김 약사. 그는 비밀리에 아주 특별한 기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엄청난 인고의 시간을 거쳐 김 약사는 ‘환자 언어 번역기’라는 이 특별한 기계를 결국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기계의 작동법은 간단하다. 보청기처럼 생긴 기계를 귀에 꼽고 환자와 대화를 하면 환자의 실제 마음의 소리가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귀로 들어온다. 이 조그마한 기계는 빅데이터에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약국의 지정학적 위치, 상권, 환자의 목소리 톤, 음성의 미세한 떨림, 환자가 앓고 있는 질환과 관련된 논문을 분석하며, 심지어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유사한 상황에 경찰차가 출동했는지 여부까지 판별하여 0.5초 내에 신속하게 약사에게 환자의 실제 속마음을 번역하여 그에 대응하여 할 말을 알려준다.

김 약사가 기계의 완성을 발표하자 약국가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서 빨리 시제품으로 출시해주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시장통에서 십 수 년 간 실전 경험을 쌓은 백전노장들은 자신들도 감당하기 힘든 상대들이 출몰하는 이 약국가에 아무리 신기한 번역기라도 분명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 예상하였다. 

번역기는 완벽하다는 신념으로 김 약사는 약학계 초유의 빅매치를 추진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 대 번역기의 대결. 기계와의 대결 상대는 약국경영의 대가이자, 1년간의 안식년을 갖으며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연구한 제주도의 오원식 약사로 정해졌다.

대결방식은 이렇다. 시장통 약국에서 오 약사와 기계를 찬 김 약사 본인이 동시에 환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대결 날짜도 강력한 상대들이 많이 나타나는 명절날 오후로 정해졌다. 드디어 대결 당일, 차례상도 마다하고 전국의 수많은 약사들이 탐라국불로의 마포를 쥐어뜯으며 실시간 생중계를 보려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첫 번째 환자가 입장하였다. 개량한복을 입고 들어오는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다. “아 약국이 좀 덥네?” 오원식 약사가 선제공격을 하였다. “에어컨을 좀 틀어드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개량한복 신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아니 감기약 타러온 사람 얼려죽일 일 있소? 뭔 약국이 이래?” 남자의 말이 끝나자 이제 번역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더우시죠? 여기 시원한 무상드링크 하나 드셔보세요- 번역기의 말에 김 약사는 자신만의 솔루션을 더해본다. 마른수건으로 음료수의 물기를 제거하고 뚜껑까지 돌려 따서 건네었다. “이 약국 서비스가 좋구만? 허허허” 오 약사의 패배였다.

첫 번째 패배를 의식한 듯 오 약사는 더 열심히 투약에 임했다. 대부분의 환자는 번역기의 말만 따라서 해도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큰 점수 차이가 없이 번역기의 승리로 대결이 종료되는 시점에 마지막 환자가 뜬금없이 처방전을 들고 왔다.

김 약사가 투약을 하면서 “김철수님! 약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번뜩하고 일어나는 환자. 날카로운 눈빛과 격앙된 말투로 “그렇게 크게 안 불러도 다 들립니다!” 번역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0.1초 동안 기계는 김 약사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평균 데시벨보다 높은지 분석을 했다. 아니다. 그렇다면 투약하는 약이 발기부전치료제 같은 민감한 약인가 분석을 했다. 아니다. 빅데이터에서 목소리가 크다고 시비가 붙은 적이 있는지 검색을 하는데 0.2초가 소모되었다.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여 환자가 오는 길에 신호위반으로 딱지를 떼였거나 법적인 소송중이어서 기분이 심란하지는 않는지 검색하는데 0.1초가 다시 소모되었다. 번역기는 결국 초기 입력 데이터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하고 명령을 내렸다. -잘 못들었습니다?- 번역기를 따라서 그대로 말한 김 약사를 보고 환자는 눈꼬리가 한층 올라간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환자의 입에서 얼큰한 말이 나오기 직전 오 약사가 나섰다. “고객님, 다음부터는 호명할 때 이름을 좀 작게 호명하라고 메모해 놓겠습니다.” 환자는 이내 잠잠해졌다. 오 약사의 승리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놓쳐버려 풀죽어 앉아있는 김 약사의 가녀린 어깨를 살포시 다독거리며 오 약사가 말했다.

“김 약사님, 우린 너무나 복잡한 세계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가끔은 환자의 언어를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그들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김 약사는 결국 번역기 출시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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