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수도권의 모 대학병원에서 진행된 임상시험 3상에서, 책임 연구자(대학병원 교수)가 심신미약 상태의 임산부를 강제로 임상시험에 등록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에 발생한 일이라고 하니 무려 11년 전이다. 제약회사 임상팀에서 일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임상시험과 관련된 기사는 주의 깊게 보는 편인데, 이 기사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KONECT)의 2018년 1월 통계에 따르면, 나라별 글로벌 임상시험 점유율은 한국이 세계 6위이며 도시별 점유율은 서울이 무려 세계 1위라고 한다.

이 말은 임상시험과 관련된 사람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처럼 의뢰자(제약회사) 입장에 있을 수도 있고, 병원의 의사 또는 약사로서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도 있다. 또한 임상시험 대상자로서 임상시험용 의약품을 직접 투여 받을 수도 있고 대상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 해당될 수도 있다.

이렇게 임상시험이 활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임상시험에 대해, 그리고 대상자의 권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긴 신약개발의 역사에 비해 임상시험 대상자의 권리가 존중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일명 ‘터스키기 사건’으로 불리는 비윤리적인 연구가 있었다.

미국판 마루타, 생체실험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연구는 1932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약 400명의 흑인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매독(syphilis)을 치료하지 않았을 때의 자연적인 경과를 관찰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환자들을 인위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 문제였다.

연구자들은 매독 환자들에게 병명을 나쁜 피(Bad Blood)라고만 알린 다음 치료 목적이라고 속이고 환자들의 혈액과 뇌척수액을 채취하였다. 또한 아스피린과 철분제를 치료약이라고 속이고 나눠주었다.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1943년쯤 매독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 페니실린이 개발되었으나 환자들은 고의적으로 치료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나쁜 피를 치료해 주겠다던 연구자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남성 환자들과 그들의 파트너, 그리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매독에 감염되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비윤리적인 사건은 1972년 한 기자의 제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연구는 즉시 중단되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1974년 임상시험 대상자의 보호를 위한 윤리원칙을 담은 벨몬트 리포트가 채택되었고 그 후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모든 기관에 임상시험을 관리 감독하는 윤리위원회(Institutional Review Board, IRB)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1964년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채택된 헬싱키 선언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연구 윤리에 대한 10가지 원칙을 제시하였으며 최근까지도 시대적인 요구를 반영하여 지속적인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임상시험 참여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발적인 참여’이다. 이것은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중간에 참여를 중단하는 것에도 해당된다. 이를 테면 단순 변심만으로도 대상자는 언제든지 임상시험 참여를 중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상자는 의뢰자나 연구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임상시험에 대한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도록 24시간 연락 가능한 연락처를 제공받게 된다. 이 내용은 임상시험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인 국제 임상시험 표준화 기준(ICH-GCP)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자발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ICH-GCP 에서는 ‘취약한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교도소와 같은 집단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 부랑자, 노숙자 등이 해당되고 제약회사의 직원도 임상시험의 참여를 거부한다면 회사 내에서 불이익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취약한 대상자에 해당된다.

위의 사례에 나온 심신미약 상태의 임산부 역시 자발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취약한 대상자로 간주된다. 현재 규정상으로는 기관 윤리위원회에서 취약한 대상자들의 임상시험 참여가 타당한지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되어 있다.

흔히 임상시험에 있어서 의뢰자(제약회사)의 역할이라고 하면 임상시험 데이터의 신뢰성만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지만 대상자의 권리와 복지를 확인하고 보호하는 것 또한 실제로는 매우 중요하다.

임상시험 분야의 일을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의뢰자의 입장으로서 대상자의 권리 보호에 대한 사명감을 느낀다.

2007년에는 위의 사례처럼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지만 11년이 지난 지금은 연구자의 윤리의식이 예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을 것이라 믿는다. 세계 임상시험 1위 도시의 국가에 속해있는 만큼 의뢰자와 연구자, 대상자 모두 임상시험에 대한 이해와 연구 윤리가 더욱 높아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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