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공단의 현지조사를 받은 안산 비뇨기과 원장이 자살한지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공단의 현지확인 대상에 오른 강릉 비뇨기과 원장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료계의 요구로 올해부터 현지조사 지침이 개선되었지만, 이제는 아예 현지조사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심지어 공단의 방문을 자체적으로 거부하겠다는 입장까지 밝혀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먼저 대한비뇨기과의사회(회장 어홍선)가 지난 5일 여의도에 위치한 건보공단 서울지사 앞에서 현지조사 폐지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실시했다.

이날 어홍선 회장은 "공단의 현지확인제도가 폐지되지 않으면 앞으로 비뇨기과의사회 회원이 건보공단의 현지확인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어 회장은 "요양기관 현지확인은 서류제출만으로 가능하며, 문제가 있다면 복지부의 현지조사를 실시하면 된다"며 "공단의 방문확인은 이중규제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또 "강압적이고 협박에 가까운 공단의 현지확인제도는 공권력의 폭력이다. 즉각 폐지돼야한다”고 주장했다.

대한개원의협의회는 6일 성명서를 통해 "공권력의 폭력적인 요구와 잘못된 제도의 부작용 아래 귀중한 의료인의 목숨이 잇달아 스러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비통함을 감출 수 없다"며 현행 현지확인 및 현지조사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행 현지확인 및 현지조사 제도는 사실상 의료인의 부도덕성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으며, 과중한 환수, 4중 처벌 등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현행 제도는 의료인의 자율적 진료권을 압박하고 제한해 결과적으로 환자들의 치료환경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개협의 설명이다.

대개협은 ▲의료인의 자율적 진료건 보장 ▲현지조사권 일원화 ▲현지조사 지침 개정안의 독소조항 폐지 ▲사전계도 시행 ▲공단 확인제도 전면 폐지 등을 주장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도 나섰다. 의사회는 “작년 여름 안산 비뇨기과 원장이 현지조사 후 자살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 29일 의료인이 건보공단 현지조사 중 자살한 사건에 대해 철저한 조사, 책임자 처벌과 함께 관련제도 폐지를 요구한다"고 9일 성명서를 배포했다.

의사회는 "연이은 의료인 자살 사건은 현 실사제도가 불공평, 부당하게 시행되며 권력을 쥔 행정당국이 의료인에게 무리한 강압적 부담을 가할 수 있다는 회피할 수 없는 산 증거"라고 강조했다.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는 현지확인제도 철폐는 물론 공단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대한일반과개원의협의회는 10일 성명서를 통해 "건강보험 진료의 심사평가와 이에 따른 조사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관련법을 준수하며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건보공단은 그 법률적 근거도 모호한 현지확인이나 수진자 조회라는 미명 하에, 마치 흉악범을 다루는 사법기관인양 강압적인 조사를 통해 의사들의 진료를 훼방하고 있다"며 "수많은 인권 침해를 일으키고, 나아가 이런 작태들은 국민과 의료진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려 국가적인 손해까지 야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협의회는 "건보공단은 국민건강보험의 보험자로서 의료서비스의 공급자인 의료기관 및 의사들과 대등한 입장이지 결코 그 위에 군림하는 빅브라더가 아니다"라며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소임을 망각하고 갑질 행위를 일삼고 있다.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건강보험 보장률로 많은 국민들이 의료비 부담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오히려 건보공단은 수천억원을 들여 호화 청사를 짓고 해마다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있다. 건보재정을 갉아먹는 진짜 원흉은 과연 누구인가"라고 한탄했다.

이어 "우리는 더 이상 건보공단의 적반하장식 만행을 두고 볼 수 없다. 이에 정부와 국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며 ▲갑질 조사의 장본인들의 엄중한 처벌 ▲위헌적 불법적인 현지확인과 수진자 조회 철폐 및 조사 기관 일원화 ▲건강보험 현지조사 시 적법한 절차 준수, 헌법에 보장된 인권 및 진료권 보장 등을 제시했다.

협의회는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12만 의사들과 함께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투쟁에 나설 것"이라며 "더 이상 동료의 애통한 죽음 앞에서 참고만 있을 수 없다. 의사들이 들고 일어선다면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보게 될 것"이라고 촉구했다.

같은 날 대한정형외과의사회 또한 현지확인 제도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의사회는 "행정조사기본법에 따르면 건보공단과 심사평가원은 공동조사를 실시해야 하고 요양기관에 대한 중복조사를 해선 안된다. 따라서 건보공단의 현지확인은 행정조사 기본법을 근본적으로 위반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건보공단의 현지확인은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하고 개인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강압적"이라며 현지확인 제도를 즉각 폐지하고, 대신 사전 계도 활성화와 서면답변 제출로 소명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을 촉구했다.

현지조사 지침 개정안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의사회는 "싸구려 약 처방을 강요하는 심평원의 지표연동자율개선제 미개선 기관을 대상으로 현지조사를 의뢰하는 등 불합리한 부분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며 "현지조사위원회 구성도 위원 12명 중 의협 대표는 1명에 불과해 의료전문가인 의사들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될 수 없도록 했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대한의원협회는 전 의료계가 공단의 현지확인을 거부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의원협회는 "안산 원장의 자살사건에 이어 강릉 원장이 자살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복지부의 현지조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현지확인의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라며 "공단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의원협회는 "공단 조사자들의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이 없다보니, 조사자들이 어떠한 부당한 행위를 해도 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검찰 고발을 통해 직권남용으로 그들의 행위를 처벌하려 해도 공무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의원협회는 "공단확인을 거부하고 실사를 받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공단확인을 받을 이유가 없고, 의료계가 전면적으로 공단확인을 거부하는 경우 그 모든 건을 복지부가 현지조사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해 건보공단노조가 자체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공단 직원 중 해당 의원(강릉)을 방문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조는 “의협과 비뇨기과의사회 등 일부 의사단체에서는 건보공단 직원이 권한 밖의 처벌을 거론하고 고압적 태도를 취해 자살로 내몰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건보공단의 어떤 직원도 해당 의원을 방문한 사실은 없었으며, 자료제출만 요청했다”고 설명했다.노조에 따르면 해당 비뇨기과의원장은 지난해 10월 19일 동료 의사인 Y마취통증의학과의원장(참관1)과 S내과의원장(참관2)을 참관인으로 대동해 공단지사를 방문했다. 대동한 참관1 의사가 관련 내용을 질의했고, 공단지사직원은 민원인의 진료확인 요청을 접수받아 현지확인을 위한 자료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등 관련 내용을 설명했다.

공단지사 방문시 해당 원장은 한 마디의 질의가 없었고, 함께 방문한 의사인 Y마취통증의학과의원장만 방문확인에 대해 질의했다.

이에 노조는 “이같은 상황에서 질의도 하지 않은 해당 K원장에게 건보공단 직원의 고압적 태도나 복지부 현지조사 의뢰 협박 등의 정황은 찾아보기 어렵다”면서 “노동조합은 의료계에서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다면 당시 참관인으로 지사를 방문했던 두명의 의사와 그 상담을 맡았던 공단직원 등에 대한 삼자 대면도 당연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노조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끊는 데에는 매우 복합적인 요소가 오랜 기간 작용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면서 “한 사람의 애통한 죽음을 의료계 일부에서 보험자인 건보공단과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하는 수단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국민건강보험법상 공단은 보험자로서(법 제13조) 보험급여의 관리를 비롯한 재정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선량한 가입자의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위임받아 재정을 보호(법 제57조)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보험자인 건보공단이 의심되는 부당청구에 대해 확인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업무해태와 직무유기이다. 유럽 주요 국가들과 같이 총액진료제도나 포괄수가제(DRG)가 시행되지 않는 행위별 수가제(Fee-for-service) 하에서, 그리고 의료적 비급여를 급여영역으로 포함시키지 않는 한 부당청구에 대한 동기유인은 근절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한국의약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